
정여립 (鄭汝立, 1546-1589)
정여립의 초기 경력은 서인 계열이었던 이이·성혼의 문인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서인의 보수적 성향과 거리가 멀어지고, 보다 개혁적이고 인재 중심의 정치관을 가진 동인 세력으로 전향하게 된다. 정여립은 문무(文武)에 모두 뛰어났고, 특히 훈련도감 책임자로 활약하며 군사 능력도 인정받았다. 또한 지방에서 강학하며 많은 제자를 모아 인망이 두터웠고, 그의 집에는 지방 유생들이 모여 토론하고 교류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후에 서인 세력은 이를 '모반 조직'(대동계)으로 규정하게 된다. 1589년, 서인 정철 등은 정여립이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조작 또는 과장하여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정여립은 체포되기 전 자결했고, 관련자 수백 명이 처형되거나 사망하는 대규모 정치적 숙청이 이어졌다. 오늘날 학계 다수는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꾀했는지에 대해 부정적이며, 정치적 경쟁을 제거하기 위한 서인의 대대적 탄압이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 Rebellion of Jeong Yeorip (1589) / 기축옥사 (己丑獄事)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여 치열하게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의 영수였던 이이의 문인이었으나, 이후 동인으로 전향하여 동인 세력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정여립은 고향인 전라도 진안을 중심으로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무술 훈련과 학문 연구를 병행했는데, 이는 중앙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모으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1589년, 황해도의 한 관리가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으며, '천하는 공물(天下公物)이므로 임금은 특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고 고변했다. 정여립은 체포되기 직전 도주하다가 자결했다. 사건의 수사는 서인의 거두였던 정철이 수사 책임자가 되었고 정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인 세력을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데 주력했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인물들, 특히 동인 소속의 많은 관료와 학자들이 역모죄로 몰려 처형당하거나 유배되었는데 이 옥사로 인해 희생된 사람이 1,000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큰 규모의 숙청이었다.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 세력은 일시적으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동인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몰락했다. 이후 정철의 강경한 숙청에 대한 보복 문제를 두고 동인 내부에서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다.
Rebellion of Jeong Yeorip (1589)
The rebellion of Jeong Yeo-rip in 1589, known in Korean as the Gichuk oksa, was one of the bloodiest political purges in Korea's Joseon Dynasty. Its scale was greater than all four of the notorious literati purges combined. At that time Joseon politics was dominated by conflict between Eastern and Western factions. Neo-Confucian scholar and Easterner Jeong Yeo-rip was accused of high treason, after which as many as 1,000 Easterners were killed or ex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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