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애국렬사릉
정치인, 독립운동가, 납북 인사, 인민배우 등



애국렬사릉

애국렬사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립묘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를 위한 묘지이다. 애국렬사, 고위 정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지지한 인물,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에서 납북된 고위 인사, 비전향 장기수 등이 묻혀 있다. 평양의 형제산구역 신미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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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ikipedia

Patriotic Martyrs' Cemetery

The Patriotic Martyrs' Cemetery is a national cemetery in North Korea located in Sinmi-ri, Hyongjesan-guyok, Pyongyang. Founded on September 17, 1986, it is officially reserved for people who contributed to the "liberation of the country" and "socialist construction". Buried here are many veteran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rmy and national officials, and outstanding citizens in the fields of science, medicine, an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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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 Kyusik (1881-1950) / 김규식



김규식 (金奎植,1881-1950)

일제강점기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을 설치하여 그 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 그 대표가 되었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 그 해 12월 27일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위원단의 서울도착을 계기로 더욱 자기의 정치노선에 정열을 쏟아, 남북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그 해 2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그 해 2월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3월 15일 김일성·김두봉의 회신에 따라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4월 21일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 4자회담을 가졌다.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그 해 12월 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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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Kim Kyusik (1881-1950)

Kim Kyu-Sik was a Korean politician and academic during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 leader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Kim served in various roles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cluding as foreign minister, ambassador, education minister and finally as the vice president from 1940 until the provisional government's dissolution on March 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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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 Soang (1887-1958) / 조소앙



조소앙 (趙素昻, 1887-1958)

1935년 7월 민족유일당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에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참여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직하였다. 1939년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외무부장에 임명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과 상임위원을 지내면서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 기간에 우익진영 3당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한국독립당(재건) 대표로 참여하여 창립선언문을 기초하였다. 1945년 8월 독립운동의 결과로 쟁취한 광복을 맞이하여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수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 기간에 신탁통치 반대를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고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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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소앙기념관

Jo Soang (1887-1958)

He participated in drawing up a draft of the proclamation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in 1918 while he was studying in Japan, and after 1919, worked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s the secretar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head of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He also organized the society of policies on current affairs with Kim Gu and Yeo Unhyeong, contributing to establish the theories on diplomac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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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 Hong Myonghui (1888-1968) / 홍명희



홍명희 (洪命憙, 1888-1968)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호는 벽초(碧初)이다.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진 인물로 실제로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6.25전쟁 당시 이광수가 납북되자 신변을 보호해주었으며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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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무위키

Hong Myonghui (1888-1968)

Hong Myong-hui was a Korean novelist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later a North Korean novelist and state official. He was born in Dongbu-ri, Goesan county, Chungcheongbuk-do, where he took part in the 3.1 Movement in 1919. In the 1920s, he served as an editor of the Donga Ilbo. After the Korean War, he occupied various important positions in North Korea. He is buried in the Patriotic Martyrs' Cemetery in Hyongjesan-guyok, Pyongyang, North Korea. His grandson, Hong Sok-jung, is also a well known North Korean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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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i Seunghee (1911-1969) / 최승희



최승희 (崔承喜, 1911-1969)

최승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용가로 남편은 좌파 문학평론가 안막이다. 두 차례 일본 유학 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반도의 무희>(1936)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 <나의 자서전>(1936)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0년대 후반에는 수 년 동안 칠레 등에서의 해외 순회 공연을 벌이면서 세계적인 명성도 얻었다. 광복 후 남편인 안막을 따라 월북해서 최승희무용연구소(평양)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연금 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후 34년뒤인 2003년 2월 한설야와 함께 복권되었고, 같은해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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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ikipedia

Choi Seunghee (1911-1969)

Choi was born into a yangban-class family in Seoul, Korea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was also known by the Japanese pronunciation of her name, Sai Shōki. Despite the Japanese policy of Sōshi-kaimei, a policy of changing Korean names to Japanese names, she retained her Korean family name of Choi. Sai is the Japanese pronunciation of the Chinese character for Choi, and was not considered 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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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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