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



병인양요 (1866)

1866년 조선 고종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으로 조선이 서양 열강과 처음으로 무력 충돌한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대원군이 실시한 천주교 박해(병인박해)가 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서양 세력의 종교인 천주교가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아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천 명의 신자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가 죽었다는 이유로 조선을 응징하기 위해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7척의 군함과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프랑스는 강화부를 점령하고 천주교 박해 책임자 처벌과 통상 수교를 요구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거부하고 무력으로 맞섰다. 조선은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중심으로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격렬히 저항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식량과 보급 부족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강화읍을 파괴하고 강화 이궁과 외규장각 등에서 왕실 도서와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특히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의궤는 2011년에야 영구 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서양 열강의 침략을 직접 경험한 첫 사건으로 이후 신미양요로 이어지며 조선의 쇄국정책 강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French Campaign Against Korea (1866)

The French campaign against Korea was an 1866 punitive expedition undertaken by the Second French Empire in retaliation for the earlier Korean execution of seven French Catholic missionaries. The encounter over Ganghwa Island lasted nearly six weeks. The result was a French retreat and a check on French influence in the region. The encounter also confirmed Korea in its isolationism for another decade, until Japan forced it to open up to trade in 1876 through the Treaty of Ga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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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 Samnangseong Fort / 삼랑성 (정족산성)


ⓒ 국가유산청

삼랑성 (정족산성)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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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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