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볜(연변)
김좌진 (청산리)
金佐鎭 (1889-1930, 한국)



김좌진 (1889-1930)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는 등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키웠다. 1911년 신민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무장 투쟁을 위한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북간도 지역에서 임시정부 산하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군 부대인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대규모 독립군을 양성하며 전투력을 강화했다. 1920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연합 부대와 함께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상대로 6일간 벌인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피해 소련 지역으로 이동해 독립군 부대 재편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30년 1월 만주 하얼빈 근처에서 공산주의 계열 인물에게 암살당하며 4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Kim Jwajin (1889-1930)

Kim was born to a wealthy family of the Andong Kim lineage in Hongseong County, Chungcheong province. His father was Kim Hyeong-gyu. When Kim was 18, he released 50 families of slaves when he publicly burned the slave registry and provided each family with enough land to live on. This was the first emancipation of slaves in moder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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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eongsanri Battle /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 (1920.10.21-26)

1920년 6월, 홍범도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자,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과 독립군 섬멸을 목적으로 대규모 병력(간도 지방 주둔 일본군)을 만주로 파견했다. 김좌진과 홍범도 등 주요 독립군 지도자들은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기 위해 병력을 청산리 일대의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 등 지형이 험준한 곳으로 집결시키고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계곡 일대에서 열흘 동안 약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이며 큰 승리를 거두고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독립군 측 피해는 경미했던 반면, 일본군은 1,000~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독립 전쟁사상 최대의 승전으로 평가된다.


Cheongsanri Battle (1920.10.21-26)

The Battle of Qingshanli was fought over six days in October 1920 between the Imperial Japanese Army and Korean armed groups in a densely wooded region of eastern Manchuria called Qīngshānlǐ. It occurred during the campaign of the Japanese army in Jiandao, during the Japanese rule of Korea (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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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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